학회원들의 글

2023 합정만화상 선정작 웹툰 <순정 히포크라테스> 리뷰 (조익상)

합정만화연구학회. 2023. 12. 31. 00:00

‘사람 고쳐 쓰는’ 이야기로 <순정 히포크라테스> 읽기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 속담도 아닌데 너무 잘 알려진 말이다. 거의 진리처럼, 마치 법칙처럼 사회 속에 스며든 이 말을 정돈하면 이런 의미다. ‘사람의 부정적 특성 혹은 본성은 고쳐지지 않는다.’ 과거 어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또 같은 잘못을 저지를 것이며, 그것은 고쳐지지 않는 부정적 특성 혹은 본성 때문이다. 이 생각은 사건 보도 등 여러 사례를 통해 실체성을 획득한다. 전과자가 더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보다는, 2범이 되고 3범이 되는 것이 뉴스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떤 재범이 뉴스가 되면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말의 무게감도 더해진다. 한 사람의 사례를 통해 모든 사람의 일반 법칙이 도출되는 마법이 일어나고야 만다.

 

하지만 인물의 성장과 변화를 그려내는 것이 의미이자 재미인 이야기들은 이 말을 그저 긍정할 수 없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를 이야기의 틀 안에서 좁혀 말하면 ‘빌런은 끝까지 빌런이다’라는 정식화가 된다. 물론 많은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애써서 ‘고쳐 써 보려던’ 빌런이 변할 듯 변할 듯하다 결국 변하지 않아서, 댓글창에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를 베스트댓글로 소환하는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야기 장치로써든, 고유의 철학을 담기 위해서든 빌런의 변화를 담는 이야기들이 있다. 빌런으로 만났으나 믿음직스러운 동지가 되는 소년만화들이 얼마나 많은가. 소년만화가 아니더라도, 골드키위새 작가의 전작 <죽어도 좋아♡>는 아예 노골적으로 ‘빌런 고쳐쓰기’를 이야기의 목표점 삼은 작품이었다. 다만 그 목표를 향하기 위해 주인공 이루다가 타임루프에 빠지는 설정과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회사 빌런 백 과장을 개과천선하게 만들기 위해 판타지 설정 속에서 루다의 시간과 희생이 담보로 잡혀야 했던 것이다.

골드키위새, <죽어도 좋아♡>(카카오웹툰)의 장면 / 백과장 갱생을 위해 애쓰는 우주

 

<순정 히포크라테스>는 <죽어도 좋아♡>의 뒤를 잇는 골드키위새 작가의 갱생 프로젝트다. 게다가 그것을 판타지 설정 없이 해낸다. 성실한 자료 조사와 독보적인 유머 뒤에 도사린 사람들의 삶에 대한 해찰과 이야기를 향한 궁리가 ‘사람 고쳐 쓰는’ 이야기를 이룩해 내고야 만다. 하지만 모든 빌런을 다 변화시킨다는 의미에서는 아니다. 오히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는 말에 대한 반례를 군데군데 담았다는 의미에서다. 이야기 속에서 한두 사람의 빌런이라도 변화하고 변화의 싹이 보인다면, 혹은 빌런까지는 아니라도 어떤 부정적인 특성을 가진 인물이 그 특성을 이겨낸다면 “사람은 고쳐 쓸 수 있다” 쪽이 논리적으로 옳은 말이 된다.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자.

 

 

우선 부정적 특성. 서브남주 유바로는 로맨스 장르 내에서의 문법으로 치면 남주와 여주 사이를 갈라놓고 여주를 뒤흔드는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빌런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의 부정적 특성은 꽤 뿌리가 깊다. 바로 사해에 대한 집착이다. 그것은 짝사랑의 왜곡된 형태일 테지만, 나름 논리와 정당성을 지녔다. 진짜 똑똑한 여자인 사해가 (자신까지 포함해) 남자로 인해 재능을 펼치는 일에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집요한 믿음이 그것이다. 어머니 소원이 커리어를 포기하게 되었던 일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선의로, 바로는 사해에게 “접근하는 버러지들”(남자들)을 치워 나간다. 그래서 그의 집착은 소유욕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보다 사해를 아끼는 그의 뒤틀린 짝사랑이 품었던 소유욕과 집착은 결국 ‘사해 4년 압수형’이란 극형을 맞이한다. “감히 내 인생을 통제하려 들어!”라는 꾸짖음과 함께 사해는 “무게 중심이 제대로 옮겨지면 그때 다시 만나자”는 숙제를 준다. 바로는 누구보다 존중해야 마땅한 사해의 뜻대로 살아보려 하기 시작한다. 시즌2 28화의 이 장면 이후로 남은 80여화 동안 <순정 히포크라테스> 안에서 보여지는 바로는 내내 그 숙제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정지안은 어떤가. 박보듬을 무시하고 깔보면서도 레즈비언 보듬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이용해 온 그녀는, 과거의 작은 성취에 매달려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 지독한 나르시시즘과 자기혐오가 동시에 그녀를 옥죄고, 지안은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보듬에게 푼다. 어머니의 육체적 정서적 학대 가운데 보듬의 짝사랑을 자신의 마지막 지지대-감정 쓰레기통 삼는 그녀는 오정윤, 임끝녀(+사달 콤비)와 함께 <순정 히포크라테스>의 비중 있는 빌런 3인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녀의 부정적 특성은, 하지만 자해로 정신과 폐쇄병동에 들어가는 경험을 통해 저지되기 시작한다. 다른 환자들을 보며 느낀 것과 더불어 마침 병동에서 만난 폴리클 사해의 조언이 주효했다. 어머니와의 “사람을 좀 먹는 관계” 때문에 아파본 적 있는 자신이라면 보듬에게 상처주기를 지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안은 깨닫는다. 그녀는 퇴원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듬이를 위한 선택”이자 “본인을 위한 선택”을 한다. 헤어지는 것, 그리고 자신을 찾는 여행을 떠나는 것. 시즌4 17화의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지안은 <순정 히포크라테스> 속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도합 38화가 더 진행된 이야기 속에서 빌런으로서의 지안은 사라졌고, 그녀의 이후를 우리는 모른다. 그래도 그녀의 미래를 두고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 말하는 것이 성급하고 모진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골드키위새, <순정 히포크라테스>(카카오웹툰)의 장면 / 지안에게 조언하는 사해

 

이처럼 이야기 속 인물의 부정적 특성에 대한 <순정 히포크라테스>의 수술은 갱생과 개과천선을 모두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계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내거나, 부정성을 끊어내거나 억제하는 인물의 시간을 담아내어 독자들이 변화의 가능성을 포착하도록 한다. 모든 인물에 대해 변화를 결론으로 내세우지 않되 변화할 가능성과 노력을 담는 것. <죽어도 좋아♡>가 백과장의 갱생을 담았던 방식과는 다른 방향이다. <순정 히포크라테스>의 다른 면모는 또 있다. 부정적 특성뿐만이 아닌 본성을 타격점으로 삼는 것이다.

 

 

본성이란 무엇인가. 타고난 것이며 그래서 더 변하기 어렵다고 믿어지는 특성이다. 부정성에 한해서 “본성은 안 변해”라는 말은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와 세트다. 범죄자의 DNA, 불우한 가정 환경, 사이코패스와 같은 정신심리학적 특성이 본성의 자리에 호출되곤 하는 요소이며, 많은 경우 자질이나 재능 등도 본성으로 논해질만큼 본성에 대한 믿음은 공고하다. 마치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공식처럼. 그래서일까. <순정 히포크라테스>의 독자의 인식 체계를 향한 말 걸기는 더 구조적으로 이루어진다. 본성론 자체를 탈신화화 하기다.

 

본성론에서는 특성이 혈통이나 환경과 관련된 본성으로 환원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똑똑하면 부모가 똑똑해서 그것을 이어받은 덕이고, 못된 성정 역시 부모나 환경 탓이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타고난 이유가 있다는 것이 본성론의 논리 구조다. 이러한 인식과 대화하며, <순정 히포크라테스>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대조적 가족 구성을 내보인다. 가령 빈부로는 바로와 사해 가족이 선명하게 대조되며, 소위 ‘정상 가족’(유바로와 오정윤 가족)과 ‘편모 가정’(장준혁과 정지안 가족)의 모양으로도 대조가 일어난다. 물론 각 가족 형태의 틀 안에서 대조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순정 히포크라테스>가 보여주는 것은 ‘정해진 공식은 없다’는 결론이다. 구체적인 예를 살피자.

 

의사가 대를 이으면 ‘로열 패밀리’라 부른다. 의사의 자녀가 의사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꽤나 강력하게 구성된 신화다. 신경외과의 반호인의 아들 오정윤은 그 신화를 가장 굳건하게 믿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것은 외려 부정적 특성들의 텃밭이 된다. 그 특성들은 사해를 시기하게 할 뿐만 아니라 주조연급 인물들 중 가장 의사 될 ‘윤리적’ 자격이 없는 인물로 정윤을 조명하게 한다. 의사 부모를 둔 인물보다 그렇지 않은 인물들이 더 많이 등장하는 것도 로열 패밀리 신화에 거리를 두는 방식일 것이다. 게다가 정윤과 달리 그의 어머니 반호인은 호인이자 멋진 의사다. ‘호부견자’를 비틀어 ‘호인견자’를 겨냥해 지은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순정 히포크라테스>의 세계에서 의사가 될 본성은 유전되지 않으며, 성격적 특성도 마찬가지다. 외도한 아버지처럼 될지 모른다는 장준혁의 불안감은 일견 이해되지만, 사해도 이야기도 그가 계속 불안하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꽤 닮은 부모-자식간(소원-바로)를 그리면서도 그들 사이의 다름 또한 포착하며, 전혀 닮지 않은 부모-자식간 관계(보듬 엄마-보듬) 역시 그려내면서, <순정 히포크라테스>는 본성론에 대한 반례들을 잔뜩 담아 두었다.

 

이런 세계를 충실히 읽어나간 독자들이라면, 본성론 신화에 사로잡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어느 시점에 고치지 못하도록 고정되는지도 모를 부정적 특성을 두고 언급되는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란 말에도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독해는 물론 내 희망이지만, 아마도 골드키위새 작가의 기획이자 목표이기도 할 것이다. ‘개저씨’를 어떻게 사람으로 만들 것인가.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을 어떻게 꾸짖을 것인가. 젊은 차별주의자를 어떻게 계도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사람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순정 히포크라테스>는 이러한 질문과 답의 서사적 총합에 가깝다. 인물을 통해 보여주되 변화 그 자체는 독자가 직접 만들어 가도록 구축한, 영리하고 올곧은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사족처럼 짚을 것은 선서의 의미다. 최종화에서 <순정 히포크라테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각 구절과 인물을 함께 담는다. “나는 스승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바로가 비치며, 바로의 가장 큰 스승인 사해의 가르침과 숙제를 되새기게 한다. “나는 양심과 품위를 유지하며 의술을 베풀겠습니다.” 이야기 내내 양심과 품위가 없었던 정윤의 얼굴과 함께, 이 말이 갖는 의미가 무겁게 다뤄진다. 정윤은 양심과 품위를 유지하며 의술을 베푸는 의사가 될 것인가. 이런 식으로 <순정 히포크라테스>는 인물들의 삶을 선서라는 인생 단면에 담아낸다. 선서는 미래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므로 이 단면이 보여주는 것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가뿐만이 아니다. 이후로 이 선서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육중한 질문이다. 이처럼 지금까지와 이후를 선서로 맞세워, <순정 히포크라테스>는 사람의 변화 가능성을 또다시 조망한다.

 

골드키위새, <순정 히포크라테스>(카카오웹툰)의 장면 / 선서하는 오정윤

 

사람은, 아마도 “고쳐 쓸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변하지는 않을지라도 누군가는 변한다. 스스로와 타인을 위해, 징벌의 교훈에 의해, 또한 새로운 인지의 촉구를 통해, 혹은 선서와 의지로. <순정 히포크라테스>를 인간 갱생 프로젝트로 바라볼 때 읽히는 것은 이런 메시지다.

 

 

글쓴이_ 조익상 (만화평론가)

>>카카오웹툰에서 <순정 히포크라테스>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