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원들의 글

2023 합정만화상 선정작 웹툰 <도토리 문화센터> 리뷰

성상민 2023. 12. 31. 00:00

일상툰의 요소를 일상툰 바깥에서 확장하다
: 웹툰 <도토리 문화센터>

 

 

웹툰 <도토리 문화센터> 쎰네일 이미지 (이미지 출처: 카카오웹툰)

 

‘일상툰’이라는 장르는 어떤 의미로는 한국 웹툰의 역사와 함께 한 장르기도 했다. 이전에도 ‘에세이’를 내건 작품이 없던 것은 아니다. 만화가 김진이 처음에는 ‘진이’라는 또 다른 필명으로 연재했던 <조그맣고 조그맣고 조그마한 사랑이야기>처럼 카툰의 문법을 응용하여 만든 짧은 호흡의 작품들이나, 권교정의 <GYO의 Real Talk> 같이 작가 본인을 형상화한 캐릭터가 등장해 작가 본인이 겪은 일을 모티브로 하며 그려낸 작품은 웹툰 이전에도 등장했다. 그러나 ‘일상툰’이 이전의 에세이 장르 만화가 결이 달라지는 점이라면, 작품 밖의 작가와 작품 안의 ‘작가를 형상화한 캐릭터’ 사이의 모호함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다수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난다의 첫 장편 웹툰이었던 <어쿠스틱 라이프>는 이러한 일상툰의 ‘모호함’을 적극적인 한편 다양한 가능성을 낳도록 배치했던 작품이었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모습들은 실제 난다 작가 본인의 삶에서 벌어진 일과 비슷한 타임라인으로 전개되었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남편과 보내는 하루하루의 삶, 그러다 찾아온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느꼈던 생각을 일상의 반복적 기록을 넘어,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편린에서 아포리아를 추출해내며 다시 이를 작품을 통해 전달했다. 회차에 따라 댓글을 통해서 무수한 말들이 쏟아져도, 작가는 다시 작품을 통해 ‘나답게 사는 삶’을 계속 살아가겠다며 넌지시 선언했다.

<어쿠스틱 라이프>의 긴 연재가 잠시 쉼표를 찍으며 가진 몇 년간의 휴식 이후, 난다 작가 새롭게 연재한 <도토리 문화센터>는 더 이상 일상툰 장르가 아니다. 명백히 가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가상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전작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작가 자신을 비롯한 실존 인물들을 바탕으로 삼고 있기에 캐릭터성을 보다 캐릭터들이 처한 상황과 감정에 초점을 두었다면, 완전한 픽션으로 전개되는 <도토리 문화센터>는 주인공을 비롯한 각각의 캐릭터들의 개성이 더욱 증가하였다. 벌어지는 사건들 역시 전작과 같은 잔잔한 어쿠스틱의 감각보다는 지속적으로 강렬한 비트가 들어가는 모던 락의 느낌에 더 가까워졌다. 그러나 전작에서 계속 이어지며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나답게 사는 것’을 모색하고, 무엇이 나를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지를 고민하는 지점이다.


작품은 이미 도입부에서부터 다양한 이들의 공간 정체성이 파괴될 수도 있는 위협적인 순간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고두리’ 부장이 근무하는 대기업 ‘유니버스그룹’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매출을 더욱 늘리기 위해 대형 쇼핑센터를 짓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계획에 방해되는 존재가 있다. 지역에서 가장 비싼 땅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기업의 시선에서는 쓸데없이 돈이 안 되는 일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도토리 문화센터’다. 1990년대 부동산 광풍에서 무려 500명에게 소유권이 쪼개 나눠진 문화센터 건물 부지에 어떻게든 쇼핑센터를 짓기 위해 유니버스그룹은 일일이 수많은 소유권자를 설득해 땅의 권리를 구매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권리를 팔고 있지 않는 네 명이 있다.

 

<도토리 문화센터> 1화 중 (이미지 출처: 카카오웹툰)


왜 이들은 막대한 보상금을 준다는 데도 끝까지 자신들의 땅을 팔지 않는 것인가. 대형 쇼핑센터 건설이라는 목표를 지닌 유니버스그룹은 물론, 매사 일에만 몰두한 채 별다른 취미도 없는 중년 여성 고두리 역시도 이 네 명의 마음을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고두리는 회사의 지시를 받고 센터에 가 이들의 속내를 알아내기 위한 ‘잠입’을 시작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속내’를 알지 못하는 것은 이 업무의 지시를 받은 고두리 본인이다. 이전보다는 직장에서의 여성 차별이 개선되었다지만, 여전히 유통업계는 보수적이고 여성이 고위직으로 승진하기 어려운 직종 중 하나이다. 고두리는 어떻게든 직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이렇다 할 취미나 제대로 된 여가를 가진 적이 없었다. 직장 내에서도 친한 동료는 딱히 있어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가 ‘문화센터’에 가게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회사의 이득을 위한 행동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지난 나날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생기는 하나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그 단초가 있기에 작품의 구도는 얼핏 보기에는 꽤나 전형적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다. 막대한 자본을 지닌 세력이 힘은 많지 않지만 ‘도토리 문화센터’라는 공간을 구심점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구도가 1화에서 바로 제시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작중에서 고두리는 자신이 유니버스그룹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철저히 숨긴채, 철저히 회사의 이득을 위해서 문화센터의 평범한 수강생으로 위장하고 있다. 작품은 고두리가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것을 간간히 서스펜스적인 소재로도 활용하면서 긴장감을 키워낸다.

하지만 작품은 그러한 전형성을 부분적으로는 작품에 대한 흥미를 모으는 요소로 사용하면서도, 단순한 대립 구도만으로서 문제를 제시하고 풀어내지 않는다. 문화센터 부지의 소유권을 팔지 않는 네 명의 과거사를 풀면서 도토리 문화센터라는 공간이 각자에게 어떤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지를 제시하고, 다시 이러한 이 네 사람의 사연 이외에도 도토리 문화센터를 찾는 다양한 군상의 모습과 심리를 엮으며 이러한 ‘지역 커뮤니티 공간’이 지닌 의미를 겹겹이 쌓아낸다.

부지의 개발 문제를 놓고 다투는 모습이 작품의 거시적인 구도이며, 도토리 문화센터라는 공간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이 작품의 미시적인 구도로 기능하는 가운데 고두리의 존재는 이 두 요소를 이어내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거대한 구조의 일부지만, 구조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도리어 자신이 그간 잊고 지냈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고두리의 변화는 행보 그 자체만으로도 강한 인상을 남기는 한편 작품이 다양한 구도와 시점을 옮겨 다니는 와중에서도 단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게 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작품은 ‘공간’이라는 요소가 그저 물리적인 요소에 그치지 않음을 지속해서 말하고 있다.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서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자신만의 공간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굴곡진 삶을 살았을지라도, 내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지닐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냈다면 그 삶은 결코 의미 없지 않다.

 

<도토리 문화센터> 97화(마지막화) 중 (이미지 출처: 카카오웹툰)


이러한 삶과 공간에 대한 사유는 ‘일상툰’의 문법이 연상되도록 연출되고 있다. 매일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압박을 주는 회사에서 치열하게 버틴 고두리의 삶은 물론 어떻게든 쉽게 자신의 공간을 자본에 내주지 않으려 하는 네 명의 삶과 과거는 마치 일상툰의 어법을 연상하듯 전개되고 있다. 특히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될 수록 이러한 느낌은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같은 공간에서 전개되어도 무척이나 독립적이다. 초반 회사가 자신에게 부여한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는 고두리는 도토리 문화센터에 머무는 네 명의 이야기를 좀 처럼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고두리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오랜 시간 서로 알고 지낸 도토리 문화센터의 4명의 이야기와 쉽게 섞이지 않으며, 마치 두 개의 일상툰이 병렬되어 교차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도 준다.

그러다 고두리가 도토리 문화센터의 구성원들과 서서히 친분을 쌓게되고, 고두리 역시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하게 되는지를 비로소 인식하게 되는 순간 독립적으로 전개되던 이야기들은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특히 고두리의 시선에서, 그저 빠른 시일 내에 회사에 소유권을 팔고 사라져야 할 ‘도구적인 존재’였던 도토리 문화센터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매일의 에피소드에서 쉽게 뺄 수 없는 존재로 등극한다. 그저 고두리 개인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그려지던 사람들의 모습은 점차 그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에 초점이 맞춰지며 다양한 색채를 지니게 된다. 본래도 개인을 중심으로 서서히 사회적으로 뻗어나가는 시선을 담아내었던 난다 작가의 일상툰 어법은, <도토리 문화센터>에서도 비슷한 경로로 점차 확장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일상툰 바깥의 장르에도 빛을 발하게 되었다.

여기에 난다 작가 특유의 파스텔톤과 부드러운 느낌의 작화는 결코 아름답게 말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묘사를 전작 <어쿠스틱 라이프>처럼 ‘어른들을 위한 동화’와도 같은 질감으로 독자들에게 제시되며, 독자들은 작중에 등장하는 가상의 공간과 인물에 대해 더욱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도토리 문화센터>는 일상툰 장르에서 벗어난 작품이, 작가 자신이 오랜 시간 일상툰에서 사용해온 연출적인 표현을 어떻게 확장시키며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작가는 작품을 연재하는 동안 공간이라는 요소는 물론, 일상툰의 문법을 어떻게 계속 새롭게 다듬고 고민할 수 있는지를 모색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앞으로의 일상툰은 물론, 또는 일상툰에 근간하여 등장할 향후의 작품들을 계속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 

 

글쓴이_성상민(만화평론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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