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올해의 합정만화상
2022년 올해의 합정만화상을 발표합니다.
올해는 세 번째 선정입니다. 조금 더 기준과 방식을 다듬었습니다. 직전 해 12월~올해 11월 사이 연재되거나 출판된 이력이 있는 완결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학회원 각자의 추천작을 취합해 12월 초부터 심사를 시작하는 방식은 작년과 동일합니다. 다만 이렇게 할 경우 심사를 시작한 이후인 12월에 완결된 작품은 심사 대상에 오르지 못하여 이듬해에야 대상 작품이 되는데, 그러면 '올해' 완결된 작품을 올해의 합정만화상으로 선정할 방법이 완전히 막히고 마는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이에 예외적으로 학회원들 다수가 읽어왔고 추천하는 작품이 12월 심사 완료 전까지 완결되는 경우에는 최종심에서 논의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새 특례 조항의 수혜작은 아래 리스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12월 완결작 및 출간작은 넉넉히 시간을 두고 내년에도 다시 후보에 오를 수 있습니다. 기간에 대한 변동은 없습니다.
올해 1차 리스트 작품들은 총 20편이었습니다. 각자 추천작을 다시 읽어보는 시간을 가진 후 2차 투표와 회의를 진행하여 본상 대상작 10편 내외를 추렸습니다. 그리고 최종 3차 투표와 논의를 통해 특례 추가 작품을 포함한 본상 수상작을 선정했습니다. 특별 언급 작에 대해서도 최종심에서 함께 논의했습니다. 심사 결과 특정 플랫폼 작품이 유독 많이 선정된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만, 의도한 바 없이 도출된 총의일 뿐이기에 딱히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플랫폼과 매체 등의 고른 안배에도 관심을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상금도 상패도 없는 상입니다. 하지만 수상작들을 조금이라도 더 알리기 위해 애쓰기로 학회원들이 함께 마음을 모았습니다. 저희가 선정한 작품들이 더 많은 눈 밝은 독자와 만난다면 그것이 '올해의 합정만화상'의 보람임을 되새깁니다.
작가님들께 축하를 전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글: 조익상 만화평론가 (2022 합정만화상 선정 총괄)
2022년 '올해의 합정만화상' 선정작
국내 작품
작품명 | 작가 | 연재 플랫폼/출판사 |
배고픈 킬러 | 엄세윤·복슬 | 카카오웹툰 |
수린당 -비늘 고치는 집- | 일링스 | 카카오웹툰 |
신의 태궁 | 해소금 | 카카오웹툰 |
아무렇지 않다 | 최다혜 | 씨네21북스 |
양아치의 스피치 | 네온비·김인정 | 카카오웹툰 |
국외 작품
작품명 | 작가 | 연재 플랫폼/출판사 |
플레이머 | 마이크 큐라토 (조고은 옮김) | F(에프) |
특별언급
작품명 | 작가 | 연재 플랫폼/출판사 |
나사와 검은 물 | 쓰게 요시하루·야마시타 유지 (한윤아 옮김)
|
타이그레스온페이퍼 |
도박중독자의 가족 | 이하진 | 카카오웹툰/열린책들 |
요나단의 목소리 | 정해나 | 딜리헙/놀 |
초인적 힘의 비밀 | 앨리슨 벡델(안서진 옮김) | 움직씨 |
2022년 올해의 합정만화상 선정인단
박범기 만화평론가, 성상민 만화평론가, 조경숙 만화평론가,
조익상 만화평론가, 최윤주 만화평론가, 한상정 만화연구자
본상
배고픈 킬러 엄세윤·복슬, 카카오웹툰
<배고픈 킬러>는 제목 그대로 배고픈 킬러의 이야기다. 피에 굶주린 킬러가 아니라 정말 밥때 되면 배고픈 킬러의 이야기. 잘 챙겨 먹어 보는 사람이 다 흐뭇하고, 특히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처럼 틈틈이 들어찬 개그들이 매력적이다. 재미있는 유머일수록 요약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한 진실이니, 아직 못 본 사람이 있다면 직접 가서 감상해줬으면 좋겠다. 노련히 강약을 조절하며 서사를 전개하는 엄세윤 작가의 스토리와 맹한 듯 섬세한 복슬 작가의 그림이 보여주는 합 또한 좋다. 가끔 킬러물이 흥행하는 것을 볼 때면 내심 다들 죽이고 싶은 사람들이 많구나 싶은데, 세상이 죽이게 미워질 때 이 말랑말랑 유쾌한 작품을 보면 웬만한 것은 전부 넘길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 모두 너무 심각해지지는 말자. 화를 낼 때 내더라도 밥은 먹고 내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선조들의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말자. 직언의 말 하나 없는데도 선명한 메시지가 부드럽게 날아와 박힌다.
by 최윤주 만화평론가 *디지털만화규장각에 실은 리뷰를 재구성함
수린당-비늘 고치는 집- 일링스, 카카오웹툰
<수린당>의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 신들에게 받은 축복이 대대손손 전수되다 보니 언젠가부터 저주처럼 족쇄가 되었다는 설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장녀는 신들의 옷을 만들어주는 '수린당'의 주인이 되어야 하고, 차녀는 성군을 낳아야 한다. 대대손손 먹고 살 걱정도, 후대가 마를 일도 없으니 오랜 옛날에는 축복이었을지 모르지만, 이 과업 때문에 이들은 원하는 것을 대대손손 포기해야만 했다. <수린당>의 주인공 '은침'과 '홍실' 자매는 자기 대에서 이 고리를 끊어내려 한다. 은침은 홍실의 행복을, 홍실은 은침의 사랑을 이루게 해주기 위해서.
서로를 위해 끝까지 가는 이 용기 있는 자매들의 행보는 아름답다. 여기에 더해 탄생한 숙명을 '봉'과 '황'의 선택도 조화롭고, 도교 세계관에 기대어 술술 풀려나가는 신들의 관계성도 재미 요소 중 하나다. 이 웹툰에는 신선, 선녀, 영수 등 수도 없이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모두 저마다의 서사를 갖고 적재적소의 자리를 찾아 자신의 역할을 한다. 작품 초반부에는 여러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다소 전개가 느슨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중반부 이후부터는 연관 없어 보였던 이야기들이 퍼즐 조각처럼 착착 맞아떨어지며 서사가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혹시라도 중간에 하차했던 독자가 있다면, 지금이 다시 올라탈 때다. <수린당>의 이 아름다운 결말을 읽지 못했다면, <수린당>을 보았어도 아직 보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by 조경숙 만화평론가
신의 태궁 해소금, 카카오웹툰
<신의 태궁>은 한국의 다양한 설화와 무속신앙을 바탕으로 한 로맨스 판타지이다. 신의 아이를 기르는 태궁과 태궁을 사랑하는 밥그릇 도깨비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로맨스 판타지로서도, 한국의 설화를 재구성한 이야기로서도 완성도가 높다.
태궁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신의 아이를 기른다. 그런 태궁을 남몰래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 밥그릇 도깨비이다. 신이 정한 법칙에 따라, 태궁과 밥그릇 도깨비는 서로 대화조차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밥그릇 도깨비는 태궁의 곁을 지키면서, 태궁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이들의 사랑은 신이 정한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그 무엇도 이들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 밥그릇 도깨비는 태궁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신이 정한 법칙을 깨버리고, 이들의 사랑은 비극을 향해 치달아간다.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하는 이의 절절한 심정이 작품의 곳곳에서 느껴진다.
<신의 태궁>은 2021년 합정만화상에서 특별언급 되었던 작품이다. 당시 본상이 아니라 특별언급을 수상했던 이유는 이 작품이 2021년 당시에는 완결되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결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작품의 높은 완성도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2022년에 다시 본상을 수상하게 된 이유는 외전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다시 한 번 끌어 올렸기 때문이다. 외전에서는 밥그릇 도깨비와 태궁이 과거에 만났던 인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한편, 먼 미래에 이들이 다시 만나는 이야기 역시 흥미롭게 그려진다. ‘아름답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순수한 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이들이 감동을 느끼기를 바란다. by 박범기 만화평론가
아무렇지 않다 최다혜, 씨네21북스
‘아무렇지 않다’는 제목처럼 작품에 등장하는 세 여성 주인공의 삶은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것처럼 보인다. 예술가로서 딱히 잘 나가지는 않지만, 크게 밑바닥으로 추락한 것은 또 아닌 고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일상의 고단함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얄팍한 휴머니즘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일상들에 어떠한 단락들이 돋아나 있는지를 매 컷마다 잠시 숨을 멈추고 들여다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예술가로서, 그리고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일상에서 수도 없이 마주치는 불합리와 구조적 모순이 슬며시 컷과 컷 사이로 배어난다. 그저 이를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아무렇지 않다’며 애써 넘기려는 것이다.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된 작화는 이 일상의 순간들을 쉽게 지나치지 않도록 돕고 있다. 쉽게 다른 컷으로 넘어가지 않게, 작품을 구성하는 각각의 컷들에 어떤 일상의 단면들이 담겨 있는지 꼼꼼히 쳐다보라며 시선을 길게 이끈다. 그렇게 쉽게 넘어갈 뻔했던 삶의 결절들은 깊은 심호흡으로 들여다 보고, 숙고해야만 중요한 순간들이 되었다.
우리는 얼마나 관계들을 추상적으로, 주입된 이미지에 따라 그려오고 읽어왔던 것일까. 아니 현실에서조차 모든 관계에 대해 대충 얼버무리며 살아왔던 것이 아닐까. 너무나 다양해서 도저히 구분조차 어려운 뭉텅이 속에서 감정의 결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집어내 준다는 점이 이 작품을 추천하는 이유이다. 작품을 따라 세상의 빠른 속도에서 벗어나 자신과 주변을 지긋이 오랫동안 관찰하고 보듬다 보면 좀 슬퍼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잰걸음을 꼭 멈춰야 한다고 생각할 때, 이 작품을 권한다. by 성상민 만화평론가
양아치의 스피치 네온비·김인정, 카카오웹툰
초반부에서부터 기발한 접근에 감탄했다. "밈, 유행어, 은어, 신조어, 비속어, 비문 없이 15분 이상 나랑 대화할 수 있다면 사귈게." 얼핏 '양아치'로 보이며 첫대사가 "개쌉노잼"이었던 고등학생 주인공 이솔에게 주어진 개인 '스피치' 과제다. 기한은 1주일. 과제의 제안자는 솔이 한눈에 반한 여학생 송이도다. 물론 솔에게는 무리할뿐만 아니라 부당해 보이기까지 한 과제다. 하지만 로맨스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작품의 주인공인지라, 솔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과제에 응한다. 여기까지 보고서 청소년의 언어 생활 교정이라는 노림수가 너무 선명하지만, 그래도 기발하니 멋지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채소연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농구에 진심이 되어버린 강백호처럼, 솔이도 어느 순간 언어 생활 개선에 진심이 되어 버린다. 진심이 되고 나니 생활 구석구석에서 다른 사람들의 언어 생활이 눈과 귀에 밟힌다. <양아치의 스피치>는 이 반환점을 넘어서며 진짜 본색을 드러낸다. 솔이라는 청소년의 언어 생활을 문제로 보아 개선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개선의 의지를 지닌 주인공 솔의 눈에 포착되는 사람들의 언어적 형편과 사정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제 독자들은 솔과 또래 청소년들을 그저 무시할 수 없고, 오히려 언어 이면의 문화와 제반 조건들에 대한 생각을 거쳐 자기 자신들을 바라보게 되고 만다. 이쯤되면 기발한 접근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시도다.
그 시도는 20화라는 짧은 분량 속에 너무나 완벽하게 압축되어 적확하게 실행되었다. 시도의 결과야 독자 개개인에 따라 다를 테지만, 내가 보기엔 대성공이다. 이 작품처럼 제대로 계몽하는 이야기를 만화로 본 것이 얼마만인가. 리터러시가 일각에서는 엄청난 화두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절에, <양아치의 스피치> 같은 계몽은 반갑기 그지없다. by 조익상 만화평론가
플레이머 마이크 큐라토 저, 조고은 역, F(에프)
청소년들의 자살 소식이 낯설지 않다. 왜 그런 일이 생기고, 그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 이 작품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14살 청소년의 즐거움과 고민, 친구들과의 정서적인 소통과 불편함, 거대한 구조적인 혐오에 대한 공포감으로 인한 질식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제야 중학교를 졸업한 청소년이 얼마나 힘들겠냐 하는 선입관은 페이지를 넘기면서 완전히 깨진다. 고통은 연령과 무관하다. 이 주인공은 유색인종, 가난함, 작은 키, 살찐 것...자신이 자신이라는 이유로 조롱받아왔다. 게다가 사람들이 자신을 ‘기타 등등’으로 분류한다고 느끼는 주인공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은 성정체성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작품의 배경이 1995년이다 보니 지금보다 훨씬 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문화가 짙었다. 학교건 성당이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게이는 영원히 지옥불에서 불타는 벌을 받아야 하는 엄청난 죄악이라며 교육받고 있다. 그러다 보니 뭔가 주변의 남학생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절대 게이가 아니며 그런 의심조차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항상 주변의 반응을 신경 쓰고 행동해야 한다. 자기검열의 일상화가 반복된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을 완전히 속이겠는가.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자기다운 말과 행동이 뛰어나가고 이는 주변의 비난을 만들어낸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서 아무와도 마음을 나눌 수 없고,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절망이 극적으로 치달아 자살을 시도하지만, 너무나 다행스럽게 그 절망에서 걸어 나온다.
대부분 해외 작품들이 페이지를 넘기기가 어렵다면, 이 작품은 36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넘어간다. 그만큼 서술이 매끄럽고 칸 연출이 다채롭다는 뜻이며 그러다보니 시각적으로도 만족감이 꽤 크다. 흑백을 기본적인 색채로 사용하지만 의미심장한 상황에서는 노란색에서 주황색, 붉은색까지의 계열들을 사용하며 색감까지 연출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내용적으로도 연출적으로도 강력하게 추천할만한 작품이다. by 한상정 만화연구자
특별 언급
나사와 검은 물 이쓰게 요시하루·야마시타 유지 저, 한윤아 역, 타이그레스온페이퍼
<나사와 검은 물>은 <つげ義春 夢と旅の世界(쓰게 요시하루의 꿈과 여행의 세계)>를 번역한 책이다. 일본의 전설적인 만화가 쓰게 요시하루가 그린 네 편의 단편만화가 실려있다. 만화책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쓰게 요시하루라는 작가를 탐구하는 연구서이기도 하다. 이 책이 지닌 두 가지 성격을 모두 높게 평가하여 이 책을 '특별언급'에 선정했다.
쓰게 요시하루는 실험적인 만화 <나사식>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작가다. <나사식>은 20세기 전후 일본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면서도 만화라는 장르의 예술적 표현형식을 극대화시킨 작품이다. 만화사를 공부하는 누구나 한 번쯤은 <나사식>을 경유할 수밖에 없는데도 국내에 이 작품을 정식으로 만날 창구가 사실상 부재한 상태였다(2006년 만화잡지 <새만화책 Vol.2>에서 <나사식>을 번역해 게재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사와 검은 물>은 <나사식>을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한 도서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쓰게 요시하루는 세계적인 만화 거장이지만, 그의 작품은 전후 맥락이 없다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출판사가 쓰게 요시하루 작가 연구서를 선택한 것은 독자를 위한 사려 깊은 결정으로 보인다. 작가 인터뷰, 연보 등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쓰게 요시하루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도 그의 세계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단 한 권으로 쓰게 요시하루에 입문할 수 있는 빛나는 책이다. by 조경숙 만화평론가
도박중독자의 가족 이하진, 카카오웹툰/열린책들
<도박중독자의 가족>은 내가 2022년 보았던 작품 중 가장 긴박하고 공포스러운 작품이었다. 도박, 정확히는 주식 중독에 빠진 친척으로 인해 한 가정이 무너져갔던 '실화' 기반의 만화. 현실의 추락은 한계가 없기에 이야기가 과연 어디까지 내려앉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읽는 내내 벼랑 끝의 면적이 자꾸만 좁아지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었고, 어린이 학습만화 같은 얼굴에서 광기마저 읽히는 듯했다.
어쩌면 작품이 그리고 있는 현실이 결코 멀지 않기 때문에 이토록 무서웠는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부터 붐이 불더니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당연해진 주식과 코인이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흐름 속에서 개인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의 크기가 다소 경시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박중독자의 가족>은 그 위험을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도박 중독을 저주가 아닌 질병으로 간주해 치료가 필요하며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관점이 좋았다. 도박 중독이란 소재는 전에도 후에도 유효하겠지만, 주식 중독을 다룬 작품으로서는 반드시 올해가 가기 전에 언급하고 싶었다. 이 시의성이 펄펄 끓는 작품을 식기 전에 공유하기 위해 2022년의 특별 언급 작품으로 선정했다. by 최윤주 만화평론가
요나단의 목소리 정해나, 딜리헙/놀
이 작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정제된 언어를, 연필 선으로 그려진 그 미묘한 표정들을, 놀 출간본에서만 만날 수 있는 수채 톤의 채색을, 무엇보다 작품을 통해 전해지는 마음을 아낀다. 작년 텀블벅 출간본에 이어 올해 단행본으로 두 번째 출간되었다는 점, 웹툰 완결 시기는 그보다도 한참 전이라는 점 등이 아니었더면 본상을 주어야 한다고 마음 다해 외쳤을 것이다. 훌륭한 퀴어 서사를 꼽으라면 <요나단의 목소리>를 우선 가운데 앉혀두고 생각을 시작할 정도로, 이 작품은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올해 본상 수상작 <플레이머>와 함께 생각하는 것도 유효하다. 성소수자와 비성소수자 독자로 이분해 두 작품의 기대 독자를 짐작해 보면 꽤 선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플레이머>는 성소수자 독자에게 더 치중하는듯 보인다. 성소수자, 특히 청소년 성소수자가 스스로(와 세계)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을 재고하도록, 그래서 세계 앞에 서도록 돕는 작품으로 읽힌다. 반면 <요나단의 목소리>는 성소수자 독자에게도 온기를 전하지만, 비성소수자들에게 전하고픈 마음이 더 크게 울리는 것 같다. 올해 유명해진 고유명사를 끌어들이자면, <요나단의 목소리>는 독자에게 누군가의 '봄날의 햇살'이 되길 권하는 이야기다. 기꺼이 따르고픈 권유다. by 조익상 만화평론가
초인적 힘의 비밀 앨리슨 벡델 저, 안서진 역, 움직씨
앨리슨 벡델은 한국에서는 아마도 만화가라는 점보다는 영화의 성평등 지수를 측정하는 기준 ‘벡델 테스트’의 고안자로 더 유명하지 않을까. 그러나 앨리슨 벡델의 주요한 커리어는 만화를 중심으로 한다. 작가 자신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펀 홈: 가족 희비극>을 비롯해, 벡델은 자신의 사적인 삶과 사회가 연결된 무수한 접점들을 함께 아우르며 사회에 명징하게 메시지를 던지는 에세이 만화를 꾸준히 그려왔던 만화가다. 마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연상시키듯, 벡델은 자신의 삶과 일상을 풀어내면서도 그와 맞닿아 있는 엮사와 사회의 단면을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그러한 작가 특유의 연출법이 어떤 이들에게는 낯설 수 있어도, 그러한 접근을 통해 작게만 보이는 개인의 삶이 결코 사회와 동떨어져 있지 않음이 더 도드라진다.
한국에서는 세 번째로 소개되는 벡델의 작품이자, 가장 최근 발표된 단행본인 <초인적 힘의 비밀>은 표면적으로는 ‘운동’을 주제로 내걸었다. 작가가 1960년 처음 태어난 순간부터 현재까지 어떠한 운동을 하면서 살아갔는지가 작품의 주된 서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벡델의 이전 작품들이 그러하듯, <초인적 힘의 비밀> 역시도 사적 에세이에서 멈추지 않는다. 벡델에게 있어 운동을 하는 것은 단순히 건강을 위한 행동이 아니다. 자신의 몸을 지키고, 나아가 자신이 자신답게 살아갈 기반을 다지기 위해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중요한 작업이다. 공개적으로 페미니스트이자 레즈비언임을 선언한 자신처럼, 사회에서 쉽게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자에게 있어 일상적인 운동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풀어내는 것이다. 최근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더불어 여성의 신체를 말하는 담론이 일신하고, ‘운동하는 여성’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퍼져나가는 지금. <초인적 힘의 비밀>은 운동이 사적으로는 물론, 사적인 삶들이 뭉쳐 유기적으로 구성되는 사회에 어떠한 영향과 변화를 주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만화가 되었다. by 성상민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