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합정만화상

2024년 올해의 합정만화상

합정만화연구학회 2024. 12. 31. 18:37

2024년 올해의 합정만화상을 발표합니다

합정만화연구학회는 지난 11월부터 12월까지 온·오프라인 회의를 거쳐 ‘2024 올해의 합정만화상’을 선정하였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선정 대상작의 발표 기간은 2023년 1월 1일부터 공개된 약 2년간으로 설정하여 발표 기간에 좌우되지 않고 다양한 작품들을 논의할 수 있도록 했다. 작품의 선정에 있어서도 다수결 투표 방식을 활용하면서도, 투표 결과 이상으로 학회원 모두가 공감하고 다같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되는 작품을 선정하면서 최대한 2024년 한국 만화계를 아우를 수 있는 만화를 고를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2024년은 어두웠다.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소추안의 부결,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정국 등 일상을 평안하게 유지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가 끝나기 며칠 전에는 제주항공 여객기의 안타까운 사고 소식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2024년에 어둠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공포를 이겨내고 각자 모일 수 있는 거리로, 광장으로 모인 사람들은 스스로가 별이 되고 빛이 되며 온갖 아집과 폭력으로 물든 어둠의 질주를 가로막을 수 있었다. 비상계엄의 순간에서 국회 앞으로 모인 불빛들은 이윽고 남태령으로, 다시 연대의 손길이 필요한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 불빛들의 곁에는 지친 마음들을 위로하고, 행동에 망설이는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무수한 창작물들이 있었다. 2016년에 이어 다시 2024년에 거리에서 울려 퍼진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처럼, 바라보고자 하는 대상을 깊게 파고들고 시대를 응시하는 만화들이 올해도 적지 않게 등장했다. 올해 합정만화상으로 선정한 작품들 역시 시대를 반영하면서, 독자에게 와닿을 수 있는 작품들을 선정하고자 하였다.

 

올해 합정만화상의 본상은 와난 작가의 <집이 없어>, 황벼리 작가의 <믿을 수 없는 영화관>, 한혜연 작가의 <세화 가는 길>, 이하진 작가의 <카산드라>, 김성희 작가의 <헤매기의 피곤과 즐거움>까지 총 다섯 작품을 선정하였다. 이 중 와난 작가의 <집이 없어>는 합정만화상을 시작한 이래 최초로 모든 학회원들의 표를 받으며 만장일치로 선정되었다. 2018년에 연재를 시작하여 지난 9월 완결된 <집이 없어>는 <어서오세요, 305호에!>로 두각을 드러냈던 와난 작가의 섬세한 접근이 빛을 발하는 수작이었다. 자신이 머물 안식처를 찾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때로는 서로 싸우고 충돌하면서도 스스로 자신들을 위한 대안적인 공간을 찾아 나가는 모습을 그리는 여정은 한국 만화 전반에 있어서 사회의 변경에 위치한 소수의 존재를 어떻게 다가가고 인식할 것인지를 새롭게 모색한 중대한 시도이자 발자취였다.

 

황벼리 작가의 <믿을 수 없는 영화관>은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통해 시각과 서사적으로 흥미로운 상상력을 덧붙여가며,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혜연 작가의 <세화, 가는 길>은 30년 넘게 만화를 그려온 작가의 원숙한 시선을 통하여 불교적인 의식으로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과정을 그리며 삶과 죽음을 성찰하고,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돌아다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하진 작가의 <카산드라>는 2012년부터 연재를 시작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서 플랫폼 연재가 약 8년간 중단되는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연재 당시부터 지니고 있던 여성 서사에 대한 추구를 멈추지 않고 끝내 지난 5월 긴 연재의 대단원을 마치며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김성희 작가의 <헤매기의 피곤과 즐거움>은 15년 넘게 여러 고단함 속에서도 에세이 만화와 르포 만화를 그려온 작가 자신이 ‘움직이는 작업실’이라는 초유의 실험을 감행하고 그 과정을 담담하게 반추하면서 만화를 그리는 의미와 작가 자신과 관계를 맺은 무수한 존재를 새롭게 바라보는 독창적인 작품이었다.

 

또한 합정만화상의 특별언급 작품으로는 박혬 작가의 <백호랑>과 유영 작가의 <열무와 알타리>를 선정하였다. <백호랑>은 한국 신화를 판타지로서 재해석하며 흥미로운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작중에 등장하는 다양한 존재들에게 정감 있는 시선으로 다가가며 많은 독자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판타지의 세계를 느끼게 만든 작품이었다. <열무와 알타리>는 장애 아동을 기르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그리며 비슷한 경험을 가진 독자들에겐 공감을, 그렇지 않은 독자들에게도 어떻게 장애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 소중한 작품이었다. 아직 할 이야기가 한참 남았던 상황에서 지난 9월 유영 작가가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많은 독자가 작가를 추모하며 독자의 이름으로 조화와 부조금을 보냈고, 유족들도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그의 작품이 얼마나 많은 독자들에게 힘과 용기가 되고 있었는지 새삼 되돌아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앞으로도 합정만화연구학회는 매년 연말마다 ‘올해의 합정만화상’ 선정을 통하여 많은 독자들에게 다시금 볼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주목하는 작업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조금씩 한국 사회에서 다양성의 가치를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차별에 저항하는 움직임에 반동을 가하려는 획책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시대를 관통하고, 독자들의 마음에 울림을 퍼트리는 작품들이 앞으로 더 필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합정만화상으로 선정된 작품들이 많은 이들에게 때로는 용기를, 때로는 위로를 줄 수 있길 바란다. _성상민 만화평론가

 

<본상>

작품 명 작가 명 발행처
집이 없어 와난 네이버웹툰
믿을 수 없는 영화관 황벼리 한겨레출판
세화, 가는 길 한혜연 카카오웹툰
카산드라 이하진 카카오웹툰
헤매기의 피곤과 즐거움 김성희 한사람연구소

 

<특별언급>

작품 명 작가 명 발행처
백호랑 박혬 네이버웹툰
열무와 알타리 유영 카카오웹툰

 


 

하나만 보고는 알 수 없는 청소년들의 삶을, 몇몇 단어나 숫자로 환원될 리 없는 그들의 입체적 면모를 섬세하고 다채로운 시선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조익상 만화평론가)

 

캐릭터 한명 한명을 붙잡고 고맙다고 말하며 끌어안고 싶다. 앞이 캄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마다 이 만화를 찾아가려 한다. 여기엔 우리가 익히 아는 절망뿐만 아니라 아직 만나지 못했던 용기마저 깃들어있으므로. (조경숙 만화평론가)

 

<어서오세요, 305호!>에서 선보였던 실존하는 존재로서의 ‘공간’과 다양한 존재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무형적 개념으로서의 ‘공간’을 그리는 감각은 <집이 없어>에 이르러 더욱 성숙한 시각으로 그려지게 되었다.(성상민 만화평론가)

 

 

 

여성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신화의 세계. <카산드라>의 세계는 지금 여기의 세계와 닮았다. 두 세계에 기적을 행하는 인격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있는 것은 전쟁과 차별, 특히 여성혐오의 현실이다. 만약 이 세계가 <카산드라> 속 트로이와 그리스보다 조금이라도 덜 괴롭다면, 그것은 페미니즘의 목소리 덕분일 것이다. '페미니즘 리부트'보다 이른 2012년에 등장한 <카산드라>는 여성의 현실을 재현하는 '여성서사' 웹툰으로서나 적대와 연대가 뒤섞인 맞수 여성들의 대결 구도를 담은 작품으로서나, 선구적 모범이라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테마와 드라마가 더없이 왕성하게 펼쳐지고 있는 2024년 이 시점에, 8년만에 복귀한 <카산드라>의 완결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기쁘고 고맙다. (조익상 만화평론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만화가가 한국은 물론 해외로 시선을 넓혀도 동종의 시도를 찾기 어려울 캠핑카를 개조해 ‘움직이는 작업실’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과연 잘 될 수 있을까. 계획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여러 난관에 빠진다. 이윽고 세계를 뒤덮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은 계획에 더욱 크게 어려움을 준다. 하지만 작가는 어려운 순간에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이 계획을 생각하게 된 계기부터 계획을 수행하면서 경험한 감정들을 진솔하게 기록한다. 실제 계획이 흘러가는 방향도 ‘성공’에 무게감을 주는 대신, 계획이 요동치는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기에 이 계획은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큰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하나는 작가 자신에게 만화를 그리며 만화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를 주는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를 주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이 계획의 과정과 흐름을 에세이와 르포가 혼재된 독특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는 점. 오랜 시간 에세이와 르포 만화에 공을 들여온 작가가 감행한 하나의 실험은 이렇게 섬세함으로 가득한 또 하나의 소중한 만화를 등장하게 만들었다. (성상민 만화평론가)